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운명,고난에 대한 태도, 2차대전 실화

by Galneryus 2025. 3. 8.

 

작가 소개: 임레 케르테스


1929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작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 <운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수용소 내에서의 생활과 전쟁 이후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던 작가의 바램이었던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자신도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며 행복했을 텐데 하는 살아보지 못했던 삶에 대한 미련이 이후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등 전쟁의 아픔을 소화해 가는 과정으로 자전적 필체로 소설로 발행하기도 했다.

책의 내용


전쟁을 통해 거대 권력과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절대 다수에 의해 파괴된 한 사람의 삶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고 왜곡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지금껏 읽어왔던 수용소 이야기(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등)와 주인공이 수용소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글의 내용이 받아들여지기 거북했고 감정이입이 잘되지 않았다.
죄르지는 아버지가 강제 노동소로 끌려감으로써 행복한 유년 시절이라 명명한 시기의 종말을 고하는 순간에도, 자신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순간과 부헨발트 수용소의 이송 그곳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 순간에도 그 모든 상황 하나하나를 묵묵히 걸어가며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삶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고통과 좌절을 1분 1초도 생략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전쟁이 끝난 후 죄르지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챕터가 아마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이지 않을까 싶다.
죄르지에게 접근한 한 기자가 수용소의 생활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말해달라 요구한다.
거기에 대한 죄르지의 대답은 “그렇다면 지옥은 지겨울 시간이 없는 장소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말을 이었다. “최소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 수용소에서는 일정한 조건하에 조금은 지겨운 시간이 있었거든요.”

내용에 대한 고찰


아우슈비츠에서도 부헨발트에서도 행복의 순간은 있었다고 말하는 죄르지.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기존 수용소 작품에 비해 더 강렬하게 왜곡되고 무너진 주인공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죄르지가 취했던 삶의 태도는 내가 취했던 삶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어릴 적 단순히 힘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동대문에서 일했을 때 같은) 사람들에게 느껴졌던 무시의 시선으로부터 난 원래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 했던 부끄러운 동질감에서 내가 처한 절망의 순간은 그저 연극에 한 장면이고 난 그 배역을 소화해 내는 배우일 뿐이라 상상했던 현 상황에 위기의식 없는 모습들이 죄르지와 다르지 않았다.
남들에 비해 쉼이 없고 힘이 들 때도 난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작은 회사를 들어가야 한다 생각했고 당연히 남들보다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왜 당연한 건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죄르지는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받아들임으로 그 안에서의 행복을 찾았고 그 기억을 의미 있게 기억함으로 삶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다.
당시 시대를 견뎌야 했던 피해 당사자인 독자들이 이런 죄르지의 태도를 보면 당시 나치 독일에 대해서보다 죄르지에게 더 큰 분노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는 어찌 보면 왜곡된 그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형성된 책임이 비단 나치 독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았던 부역자들과 그들을 방관했던 모두에게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내가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죄르지와 같았으나 그 끝이 같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나조차 관심 없던 내 삶을 이끌어주시고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 어머니의 기도가 내 삶의 존엄성을 잃지 않게 해주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을 이끌었다.
이것이 내가 지금의 내가 된 방법이며 유일한 비결이라 생각한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사랑하는 자녀 리온이의 앞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