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잊혀진 아픔으로 부터 시작된 이야기
1997년 즈음,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TV에서 소개되었다.
‘훈 할머니’라는 이름의 그분은 열여섯 나이에 일제에 의해 캄보디아로 끌려가 그곳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후 그곳에 정착해 살아가게 되었다.
이후 할머니의 조국인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조국도, 그리고 가해국인 일본도 할머니에게 어떤 배려나 보상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끌려가 착취당했던 캄보디아에서, 할머니는 제2의 삶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중, 어떤 계기로 1998년 할머니는 한국 국적을 되찾고 고향 땅인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조국은 이미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 있었고, 결국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약 4개월 만에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셨다.
열여섯의 꽃다운 시절, '이남이 ' 라는 이름을 가졌던 한 조선인 소녀는 그렇게 ‘하나코’라는 일본 이름을 거쳐, 캄보디아에서는 ‘훈’이라는 이름으로 살며 ‘캄보디아 할머니’가 되었다.
작가 차인표는 훈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분노와 안타까움을 안은 채 소설의 초안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출판이 미뤄졌고, 그 사이 할머니는 결국 2001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후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잠시 불꽃처럼 피어오르다가 금세 사그라들곤 했다.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가슴 깊이 묻은 채 살아가던 할머니들은 한 분씩, 또 한 분씩 세상을 떠나고 계셨다.
2. 호랑이 마을에서 싹트는 사랑
옛날 옛적, 호랑이 마을의 사람들과 호랑이들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약초를 캐다 길을 잃은 할머니를 호랑이들이 마을까지 인도해 주기도 했고, 마을 사람들은 배고파하는 아기 호랑이들을 위해 어미소의 젖을 짜서 나누어 주기도 하며,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임금님이 호랑이를 사냥하겠다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마을로 찾아왔다.
이후로 전국의 이름난 포수들이 앞다퉈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호랑이들 역시 삶의 터전을 잃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점점 포악하게 변해 갔다.
세월이 흘러가며 사람들은 호랑이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호랑이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랑이 산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런 호랑이 마을에 어느 날, 황포수와 그의 아들 용이가 촌장을 찾아온다.
황포수가 마을을 찾은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의 가족을 해친 백호를 잡기 위해서였다.
황포수가 살기를 내뿜으며 백호에게 복수를 다짐하던 그날, 용이와 순이는 처음으로 만났다.
마을 촌장의 손녀인 순이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인 촌장과 함께 살아왔다.
그녀는 마음씨 고운 소녀로 자라, 동네 천덕꾸러기 훌쩍이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따뜻한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쌀쌀맞았던 용이였지만, 순이는 그런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주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나가기 시작했다.
복수를 다짐하며 발을 디딘 호랑이 마을은, 용이에게 어느새 가장 따스한 안식처가 되어갔다.
3. 식민지 수탈의 아픔이 덮친 호랑이 마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사랑을 키워가던 용이와 순이에게도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이별이 찾아왔다.
황포수가 백호를 잡기 위해 마을을 떠나 있는 사이, 엄대와 그의 패거리가 황포수의 집에서 발견한 사냥총을 들고 호랑이를 잡겠다며 산에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그날 저녁시간이 지나도록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밤, 황포수는 혼자 총과 횃불을 들고 아이들을 찾아 산 속으로 향했고, 이튿날 아침, 피 묻은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들고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은 곧 분노로 들끓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황포수에게 돌렸고, 끝내 그의 움막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그리하여 황포수와 용이는 쫓기듯 마을을 떠나, 호랑이 산 깊숙이 몸을 숨겼다.
죽음의 사냥꾼이라 불리던 황포수는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그들을 원망하는 대신 조용히 용서한 채 아무말 없이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렇게 용이는 순이, 그리고 훌쩍이와 이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7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른 뒤, 가즈오라는 이름의 일본군 장교가 부대를 이끌고 호랑이 마을에 주둔하게 된다.
마을에도 식민지 수탈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가즈오는 주둔 생활 속에서 순이를 눈여겨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의 명령으로 마을에 호구 조사 명령이 내려진다.
그 조사에 감춰진 진짜 의도를 알게 된 순간, 가즈오는 충격을 받는다.
조사 결과로 호랑이 마을에서는 열아홉이 된 순이가 ‘위안부’로 차출되기로 했다.
가즈오는 자신이 속한 제국의 추악한 민낯을 목격하게 되었고, 순이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다.
한편, 용이 역시 순이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는 망설임 없이 위안부로 끌려간 처녀들이 모인 집결지로 홀로 잠입해 순이를 구하기 위한 길에 나선다.
아마 이 챕터가 이 소설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자,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면일 것이다.
호랑이 마을의 순이는 다행히도 가즈오와 용이를 통해 구원의 한 줄기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만, 그와는 달리 전국 각지에서 차출된 수많은 열아홉, 열여덟, 그보다 어린 나이의 소녀들은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 어린 소녀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이, 그렇게 힘없이 사그라져갔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사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새겨질때 마다 마음 한켠이 저릿하게 아려온다.
소설이 들려주는 한 인물의 구원 기회 너머, 역사속에서 여전히 외면당했던 수많은 목소리와 울음이 겹쳐져, 그 장면은 더없이 슬프고 또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4. 용서하는 법
순이를 구해낸 용이는 호랑이 산에 자신의 은신처에서 순이와 잠깐의 눈물의 재회를 하게 된다.
순이는 그간 백호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호랑이산에서 혼자 살아왔던 용이에게 용서를 이야기 해준다.
"난 네가 백호를 용서해 주면, 엄마별을 볼 수 있게 될 것 같아."
용이가 가엾고 안타까워, 순이가 말합니다.
"모르겠어. 용서를....어떻게 하는 건지.상대가 빌지도 않은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용서는 백호가 용서를 빌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엄마별 때문에 하는 거야. 엄마별이 너무 보고 싶으니까. 엄마가 너무 소중하니까."
P.195/240 <4.용이의 전쟁>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용이와 순이의 은신처는 결국 일본군에게 발각되게 되고 용이는 포위되어 절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 순간 가즈오는 순이를 구하고자 순이와 함께 탈출을 감행하며 순이에게 자신의 진심을 담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순이 씨,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 나라에 와서 전쟁을 해서 미안합니다.
평화로운 땅을 피로 물들여서 미안합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당신을 짓밟아서 미안합니다.
순결한 당신의 몸을 찢고, 그 아름다운 두 눈에 눈물 흘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P.219/240 <5.백두산의 안개 속으로>
가즈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순이를 일본군들에게 빼앗기게 되고 가즈오는 멀어져가는 순이를 바라보며 사늘하게 식어버리고 만다.
일본 제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앞에서 개인의 목숨을 건 발버둥은 이렇게 간단하게 밟히고 사라져 버렸다.
5. 다시 돌아온 잘가요 언덕에서..
70년이 지난 잘가요 마을에 89세 쑤니라는 이름의 한 할머니가 작은 버스를 타고 도착한다.
필리핀의 작은섬에서 발견된 쑤니 할머니는 대한민국에 도착해서는 서투른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이름은 쑤니 입니다. 고향은 호랑이 마을입니다."
P.226/240 <뒷이야기. 잘가요 언덕에서>
70년 만에 다시 고향 땅을 밟은 쑤니 할머니.
그분의 눈은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 기억 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 용이와 훌쩍이와 함께 들판을 달리며 웃음 짓던 19살 순이의 모습이 할머니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리라.
비록 지금의 몸은 89세 노인의 모습일지라도, 마음만은 그날의 순이로 되돌아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던 호랑이 마을을 걸으며, 잊지 못할 추억의 조각들을 더듬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호랑이 마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사일 기지가 들어섰지만,그 땅 위에 남겨진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너무도 잔인하게도 속절없이 흘러갔다.
행복했던 그날들은 하나의 단절된 기억으로만 남았다.
그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거나,또 다른 삶 속에서 그 시절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쑤니 할머니가 사라진 뒤에도 호랑이 마을은,강원도라는 고장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순이만 사라진채 삶은 그렇게 흘러가 있었다.
순이가 끌려가기 전, 포대기에 싸여있던 아기 샘물이는이제 백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되어
쑤니 할머니를 조용히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모여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쑤니 할머니의 귀향을 함께 기념했다.
샘물이는 조심스레 오래된 나무조각 하나를 건넨다.
몇 년에 한 번씩 누군가가 집에 찾아와, 순이 할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 나무조각을 맡기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꼭 언젠가 만나게 되면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쑤니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 나무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뒷면에 새겨진 작은 글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 짧은 문장 속에는 모든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그토록 바래왔던 한사람의 평생의 숙제가 끝난, 메세지가 담겨있었다.
따뜻하다, 엄마별
P.231/240 <뒷이야기. 잘가요 언덕에서>
그 글을 다 읽은 순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염없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그렇게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을 껴안았고, 사라진 친구들을 가슴에 다시 한 번 품었다.
마음이 아프다.
순이와 용이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얼마나 평범하고도 따뜻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호랑이 마을이라는 그 작은 안식처는, 아마도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제국주의의 광기는 그 가능성을 너무나 잔인하게 빼앗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고 무너져 내렸다.
이름 없는 소녀들, 이제 막 꽃 피우려던 삶의 문턱에서 한 줄기 희망도 없이 끌려가야만 했던 그들은 그저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랑을 꿈꾸던 딸이었고, 웃음 많던 친구였으며, 따뜻한 하루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정말 가슴 아픈 건, ‘위안부’라는 단어 표면뒤에 그 끔찍한 현실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추억, 그리고 행복할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이 함께 지워졌다는 사실이다.
각자가 하나의 우주였던 존재들이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은 그들은, 더 이상 잃어버린 가능성만을 붙잡고 애달파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픔을 온전히 드러내는 용기를 냈고, 침묵하지 않음으로써 역사를 기록했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이 세상에 잊히지 않도록,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했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의 증언자가 되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았어야 할 사과를 당당히 요구했고,
죽음 같은 시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담담히 하루하루를 살아냈으며, 역사 앞에 진실을 바로 잡았다.
생각할수록 눈물이 흐른다.
그토록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인한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면서도,
그들은 미움이 아닌, 오히려 용서를, 미래를 이야기했다.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를 조롱했던 사람들 조차 용서를 했던 예수님처럼,
그녀들은 죽음과 같은 아픔 속에서도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분들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그분들의 목소리와 행동 안에서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배운다.
무너진 삶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사랑을 선택한 그분들에게서,
나는 인간의 강인함과 따뜻함,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를 통한 ‘희망’이라는 단어를 다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