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회
요새 들어 느끼는 건데, 사람을 사람으로서 예의를 다해 마주하는 사람을 의외로 찾기 힘든 시대인 거 같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린다는것이 이렇게도 드물고 힘든 일인가 싶을 정도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다.
단편적인 예로, 인터넷 정치 기사의 댓글만 봐도 익명의 뒤편에 숨어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여과 없이 뽐내기도 한다.
누구는 우측에서, 누구는 좌측에서 서로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될 절대 악이라도 되는 양 저주의 말과 패륜적인 모욕의 언어들을 서슴없이 투척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는 정의이기에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한때, 남과 똑같은건 싫다고 소리치던 X세대들도 정작 나이가 들고 안정적인 자리에 정착을 하니 MZ세대들의 개성을 개념 없음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지..? 하.. 저놈은 왜저렇게 사이코 같지? 여기서 나만 정상이야? "
작가 권석천은 그런 생각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낯선 나와 마주치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믿는 순간 편견의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지고, 믿는 순간 맞은편 차량과 추돌한다. 한 고비 돌 때마다 가능한 길게 클랙슨을 울려야 한다. P 17
2. 냉혹한 현실속에 예의를 잃어버린 인간
냉혹한 현실속에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사람과 사람 간에 예의가 더욱 느껴지기 힘들어진다.
가난했던 우리네 부모님들은 그런 무시와 천대를 경험하며 자식들만은 본인들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길 바라며 사회적 성공을 위한 뒷바라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부하고 성공하길 가르쳤다.
그 자식들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기어코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잃어버린 영혼은 회수되지 않는다.
머리좋고 사악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판사, 검사들 보면 알 수 있어. 그 좋은 머리로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유죄 추정의 구멍들을 메워서 기소하고, 유죄 판결 하는 걸 보라고, 그 죗값을 어떻게 치르려는 건지…” P 192
결국은 잃어버린 영혼의 빈자리에 성공에 대한 목적의식이 가득해짐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결국 부모세대들이 당했던 무시와 천대를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누군가에게 그대로 전가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보지 못하고 사람위에 성공에 대한 목적의식을 두면서 마땅히 돌아보야 할 아픔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한 사람이 모자란 사람이라 피해자의 아픔을 가볍게 밟아버린다.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이 물음들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다. P 31
3. 그럼에도 갖춰야 하는 예의
성공한 모든 사람이 사악하다고 할 순 없다. 정말 처절한 노력과 희생으로 얻은 결과를 폄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성공의 과정에서 어떠한 계기로라도 나 스스로의 악을 들여다봤다면, 악과의 대면을 통해 냉철한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할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자기 합리화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의 변치 않는 진리로 기준이 서있어야 할 것이다.
현실은 순정만화가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말하듯 “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다. P 218
사회속에서 섞여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아마도 별 수 없이 우리는 대체로 나쁜 사람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타인을 존중받을 인간으로 보고 타인의 아픔에서 연민을 느끼며 내 것을 나누어주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희생을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같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기준을 잡고 살아야 할지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지가 명확해지는 거 같다. 정말 한순간의 실수로 없어지는 돈과 지위가 아닌 변치 않을 진리이신 그 한 분을 의지하며 세상에 나아갈 때 그래야만 인간을 인간답게 볼 수 있는 인격이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