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굴의 의지를 가진 위인_데이비드 스타 조던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P.176/204 < 에필로그 >
김겨울 작가의 추천사처럼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려 하지 말고 책을 접해보라"는 말에 따라 밀리의 서재로 독서를 시작했다.
책의 시작은 평생의 업적이 무너진 시점에서, 그 바닥을 치고 다시 꿋꿋하게 업적을 재건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책의 성격은 분류학에 관한 책처럼 보였고, 그중 뚜렷한 업적을 남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역경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뚜렷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는지 분석하는 듯했다.
작가는 중간중간 자신의 현실을 대입하며, 자신이 처한 폐허로부터 일어날 힘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찾았다.
주인공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무너진 자리에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하나 묵묵히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
“나는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다”라고 데이비드는 설명한다. 그의 어조에서 어깨를 으쓱하는 느낌이 베어난다. P.56/204 <4.꼬리를 좇다>
2. 인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빌런_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런데 이 사람이 스탠포드로 옮겨가고 난 후 책의 장르가 바뀌기 시작한다.
스탠퍼드 부인의 사망 시점에 이르러서는 추리 소설의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시점에서는 사회 고발문의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장르가 어찌 됐든 처음 불굴의 의지를 가졌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사실 히어로가 아닌 빌런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는 어류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위계를 적용하여 구분하려 했다. 자신과 다른 인종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표본으로 만들고 박제했던 어류와 같이 위계를 밝히고 정리해야 하는, 다른 종류의 생물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우생학이라는 저주받을 악행이 시작된것이다.
나는 계속 걸었다. 이 황량하고 외딴 언덕이 우생학적 몰살의 진원이라 생각하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이나라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라 간주하는 그 사고방식, 우리가 초등학생에게 나치, 다른 사람들, 나쁜 놈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악행, 그것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가 바로 우리였다. P.140/204 <12. 민들레 >
결국 그로부터 삶을 재건하려는 힘을 얻고자 했던 작가는 다른 방향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삶은... 삶의 의미는 여러 시점으로부터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
그 다양함을 처음부터 보길 거부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평생의 업적을 부정당하는 천벌을 받게 된다.
자연의 위계는 사다리와 같이 인간 편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평생을 바쳐가며 불굴의 의지로 쌓았던 업적, 그렇게도 분류하고자 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나투라 논 파싯 살툼 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P.135/204 <11. 사다리 >
3. 결국..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편의대로 어류로 일괄 구분했던... 그리고 그런 편의성을 자신과 동류에게도 적용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결국 평생 동안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업적들이 사실은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이라는 평가를 후대에 의해 받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두 가지다.
- 삶은, 그리고 우주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 세상의 균형의 법칙은 절대 깨지지 않기에 악은 반드시 처벌받고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
인간의 시선은 짧고 단편적이기에 지금의 내 상황이 최종 완성형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다가온다.
우리는 현재의 이 시간을 기어코 1분 1초 하나하나 온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현재밖에 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준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로 생각하고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만큼만 인지하는 불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반면, 우리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의 시선은 천지창조의 처음부터 최후의 그때까지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신다.
그 엄청난 스케일 안에서 나는 어쩌면 먼지의 티끌의 티끌 같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아들과 자녀의 관계를 맺길 원하셨고, 우리의 죄를 없애주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까지 인간들의 손에 넘기는 희생을 감내하셨다.
그럼으로써 기어코 우주의 티끌의 티끌의 티끌은 전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라는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미를 가진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P.149/204 < 12. 민들레 >
그분의 계획 안에서 빛 가운데로 걸으면 반드시 그 끝은 빛 가운데 거하리라는 뜻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균형이고 그것이 보존의 법칙이라 반드시 믿는다.